요즘 내가 무심코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걸 알아챘다. 어머나! TV나 유튜브를 보면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분들이 있어서 재미 삼아 따라 했더니 스며든 듯하다. 뭐여~, 그려~. 이 비슷하게 말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작년인가 몇 달 전인가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비디오와 드라마를 몇 편 봤었었다. 그래서인지 전에는 그 억양과 몇 단어를 따라 하고 있었다. 난 참 영향을 잘 받는다. (나름 물이 잘 드는 순수한 사람? 크흑!)
이런 이유로 어제 한국어의 방언이 궁금해져서 나무위키에서 자료를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러다가 진짜 뒤집어지는 사실 발견! 생텍쥐페리의 작품 "어린 왕자"를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한 책이 진짜로 있다.
옮긴이는 최현애, 출판사는 이팝이고, 2020년에 출판되었다. 경상도 포항지방의 방언에 따라 구어체 문장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제목이 "애린 왕자"다!!! 제목부터 친근하고 정감 있다.
나무위키의 발췌문을 그대로 가져와 보면,
속 이바구할 인간도 없재. 일 이바구 밖에 할 게 더 있긋나. 6년 전에 뱅기 몰다가 사하라 사막에 떨어졌붓지. 모다에 머가 나간기라. 기관사가 있나 손님이 있었긋나 수리할라믄 내 혼자 욕 봐야지 별 수 있긋나. 가진 물로까 일주일 겨우 버틸랑카 싶았제.
첫날은 복새 위에 누바가 잤지. 사람 코빼기도 안비는 허허벌판 사막에 있다보이 바다 가운데서 땟목 타고 둥둥 흘러가는 난파선 우에 뱃사람보다 훨씬 외로븐기라. 어슴푸레 해 뜰 때쯤 됐을랑가 웬 어린아가 낼 깨워가 시껍했다아이가.
"저기... 양 한 마리만 그려도."
"뭐라카노."
"양 한 마리만 그려달라켔는데."
"4시에 니가 온다카믄, 나는 3시부터 행복할끼라. 4시가 되모, 내는 안달이 나가 안절부절 몬하겠제."
"사막이 아름다븐 기는 어딘가 응굴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데이."
"질들인다 카는 기 먼 뜻이냐고?" 미구가 이바구해따. "그긴 ‘관계를 맺는다’카는 뜻인데." "관계를 맺는다꼬?" "하모" 미구가 이바구해따. "나는 여즉 내 한테는 흔한 여러 얼라들 하고 다를 기 없는 한 얼라일 뿌인기라. 그래가 나는 니가 필요없데이. 니도 역시 내가 필요 없제. 나도 마 시상에 흔해 빠진 다른 미구하고 다를끼 한도 없능기라, 군데 니가 나를 질들이모 우리사 서로 필요하게 안 되나.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뿌인기라. 내도 니한테 시상에 하나뿌인 존재가 될 끼고…." "잘 가그래이" 미구가 말해따. "내 비밀은 이기다. 아주 간단테이. 맘으로 바야 잘 빈다카는 거.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카이."
이것 읽고 정말이지 뒤집어졌다. 웃느라고 눈물도 났다.
"어린 왕자"를 경상도 버전으로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분들 모두 너무너무 대단하다. 참신하고 신박하다.
경상도 버전 "애린 왕자"가 인스타페이 주간 베스트셀러 2월 3주차 5위에 올랐다고 하니 인기도 있었던 것 같다. 사라져 가는 한국의 지방 사투리로 번역하고 또 글로 남긴 이 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전라도 방언으로 번역된 "에린 왕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발췌문이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 번역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린 왕자, 애린 왕자, 에린 왕자. 모음 하나 다른 건데 주는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다들 정감 있다.
"애린 왕자"에 대한 나무위키를 찾아 읽었더니 유튜브가 벌써 알아채고 교보문고의 "애린 왕자" 읽어주는 책 비디오를 띄운다. 무서운 유튜브~
들어보니 완전 색다른 맛이 있다. 엄청 정감 있다.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와는 또 다른 맛이다. 여우 목소리는 귀엽고 오히려 표준어보다 귀에 더 쏙쏙 들어오기도 한다.
예전부터 쓰던 클래식 경상도 사투리는 내가 경상도에 연고가 없어서 알아듣기 힘들다. 부산에 몇 번 놀러 갔었는데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많이들 싸우는 것처럼 들렸다. 하하하. 전반적으로 말투가 세다.
대학 동기 중 부산에서 올라온 아이는 아주 귀여운 부산 말씨를 가졌었다. 그 아이 말투를 듣고는 10대-20대의 부산 여자 말씨는 참 이쁘다 생각했다. 대구 쪽 10대-20대 여자 말씨는 개인적으로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른 경상도 출신 동기들은 대부분 사투리를 안 썼다. 하지만 고향 내려가면 다시 사투리를 쓴다고 했다.
그런데 "애린 왕자" 갱상도 버전이 내 귀에는 듣기가 좋다. 위 비디오의 사투리가 내겐 순한맛 버전처럼 느껴지는데 암튼 이런 레벨의 경상도 사투리를 좋아하는가 보다.
'여가 시간 > 책 한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Snows of Kilimanjaro and Other Stories by Ernest Hemingway 어니스트 헤밍웨이 (2) | 2024.02.07 |
---|---|
엉뚱하고 괴기스럽고 재밌는 로알드 달 (Roald Dahl) 작품들 (4) | 2024.02.05 |
"Dragon Teeth" by Michael Crichton 마이클 크라이튼 (11) | 2024.01.28 |
도서관에서 책을 그냥 사버린 아이들 (15) | 2022.08.22 |
"Studio Ghibli" 스튜디오 지블리 - 둘째가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 (8) | 2020.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