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0월 18일 다른 블로그를 운영할 때 올린 것을 약간 수정해서 재 포스팅합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생몰: 1450 또는 1451년~1506년)를 떠올리면 흔히 지구가 평평하다는 기존의 편견을 깨고 구형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했고 이를 증명한 사람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실제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콜럼버스 시대의 학자들이 지구가 평평해서 먼바다로 가면 폭포 같은 낭떠러지에서 뚝 떨어져 사라지게 된다고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가 아무리 중세의 암흑기 분위기였지만 학자들이 그렇게 아둔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겁 없이 먼바다로 나갔더니만
이렇게 배가 하나씩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중세에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 또는 그전 이집트의 자료들이 학자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주로 기독교 교회의 수도승과 사제들이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지식이 독점되어 있었고요. (당시는 서유럽은 가톨릭만 있었으니 기독교는 가톨릭을 의미)
로마에 초기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사상만이 퍼진 것이 아니에요. 유대교와 예수의 사상을 로마에 쉽게 전파하기 위해 로마의 기존 철학 및 종교와도 어느 정도 접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기독교가 완전히 로마의 국교를 되면서도 그리스와 로마적인 사상을 이용해 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이용했고요.
로마가 망한 후, 중세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신을 이해하는 데 고대의 지식들이 사용되는 것 등으로 과거의 사상이나 생각들이 조금씩 이어져 내려와 있었습니다. 아랍 쪽은 유럽보다 더 많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적어도 유럽의 교육받은 자들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콜럼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뱃사람들도 지구를 포함 태양과 달이 구형의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바다에서 방향을 잡을 때 이용했었고요.
그럼 왜 콜럼버스가 유럽의 서쪽, 즉 대서양을 가로질러 동양에 가겠다는 계획을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까요? 그건 콜럼버스가 계산한 지구의 크기가 당시 학자들이나 교육받은 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지구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학자층에서는 당연히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일설에는 고대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는 교역도 했다고 하는데 그건 극히 일부인 것 같고요. 그리고 그 교역해로는 아마도 극비의 무역비밀이었기에 무슨 사건등으로 다음 세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는 비밀이 되어 버리죠. 바이킹 리프 에릭슨(Leif Ericson)도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에 바이킹의 정착마을을 건설했지만 스칸디나비아에 있는 바이킹과의 물품 공급 등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자 점차 쇠퇴해 사라지고 말았고요.
유럽에서는 교역 때문에도 동양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영향을 받아 중국 (Cathay)과 일본 (Cipangu)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화려하고 사람들이 잘 사는 중국과 금이 많다는 일본은 완전 판타지랜드였죠. (그런데 마르코 폴로는 원과 일본 사이의 고려를 왜 무시했지??? ㅠㅠ) 마르코 폴로 영향으로 유럽인들에게는 중국에 대한 판타지가 컸어요.
또 후추 및 동방의 물품들이 유럽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아서 지중해 여러 도시국가들은 중계무역으로 성장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동지중해를 석권해 아시아와의 중개 무역권과 해군력을 강화합니다. 따라서 유럽국가의 지중해 거점은 하나씩 하나씩 쇠퇴하게 된 거죠.
지중해 대신에 유럽의 서쪽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그저 가고 가고 또 가서 중국이나 인도와 직접 교역하는 방법도 생각해 봅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 하지만 그들은 대서양이 너무 거대한 바다라서 가다가 물과 음식 부족으로 죽게 된다고 여겼어요.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으니 당연히 태평양의 존재도 알 수 없고요. 그들 판단으로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그저 무시무시하게 큰 한 덩이의 거대 바다인 대서양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콜럼버스는 자주 서신으로 교류를 하던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점성술가, 수학자, 천지학자였던 토스카넬리(Toscanelli)의 영향을 받아 아래와 같은 지리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의 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모른 채 거대 바다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다고 믿었기에 틀렸고, 콜럼버스는 지구 크기를 훨씬 작게 잡은 데다 아메리카 존재도 몰랐기에 당시 학자들과 콜럼버스 둘 다 틀렸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따지면 콜럼버스가 더 틀렸겠고요.
"당시 가톨릭 신봉자들이 세상은 평평하고 먼바다가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는데 콜럼버스가 지구는 구형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했고 이를 증명했다"라고 잘못 알려진 이야기는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 (Washington Irving)이 1828년에 발표한 콜럼버스 전기의 영향이 큽니다.
워싱턴 어빙은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과 "립 밴 윙클 (Rip Van Winkle)"의 작가로 유명한 분이에요.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발상의 전환이 이룬 성공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이뤄진 것에 더 가깝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 마침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발상의 전환을 하자" 등으로 동기 부여를 하기에 콜럼버스를 예로 드는 것은 사실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도전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P.S.
원래는 콜럼버스의 달걀도 이 포스팅에 포함했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뺐었어요. 그런데 질문하신 분이 있어서 추가했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 일화는 대충 이렇습니다. 콜럼버스가 아시아와의 신항로 개척을 성공하고 돌아오자 그를 비아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인도 항해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스페인에 명석한 많은 인물들이 많아서 결국엔 개척했을 거요.
별 대단한 업적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콜럼버스의 인도 항해 개척을 깍아내리려고 했어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엄밀히는 현대의 케러비안 섬에 도착한 것이지만 아무튼 그와 일행들, 그리고 유럽에서도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정확히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에게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워보라고 주문을 하죠. 둥글둥글 달걀을 세우는 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모두들 실패합니다. 그러자 콜럼버스가 달걀의 아래쪽 껍데기를 살짝 깨뜨려 똑바로 세웁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전하고자 하는 논점을 이해합니다.
제일 처음 하는 게 가장 어려운 거다.
그다음은 다들 따라 하면 되니까.
콜럼버스 달걀은 이태리 역사가 Girolamo Benzoni가 1565년에 발표한 "신세계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Benzoni가 신세계의 역사를 발표하기 15년 전쯤에 Giorgio Vasari라는 이태리 화가이자 건축가가 비슷한 일화를 이미 발표했어요. 당시 Benzoni는 아직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있었을 시기고요. Vasari는 피오레 (Fiore)의 산타마리아 돔을 디자인한 젊은 건축가 Filippo Brunelleschi에 대한 이야기에서 콜럼버스의 달걀과 비슷한 일화를 전해줍니다.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콜럼버스가 워낙 유명하고 신대륙 발견이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다니니까 나중에 콜럼버스 달걀 같은 여러 이야기들이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어요.
* 위 사진출처: Google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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