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10월 29일 다른 블로그를 운영할 때 올린 것을 재 포스팅합니다.
요즘 제 남편이 푸~욱 빠져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남편은 일본 애니를 꽤 좋아하네요. 미국 애니도 즐기지만 아마도 일본 애니는 그 특유의 독특한 느낌이 미국 애니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남편이 빠져 있는 애니는 바둑을 주제로 한 시리즈로 "Hikaru no Go(ヒカルの碁)"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Hikaru's Go"니까 히카루의 바둑이라고 번역되겠네요. 원방송은 일본 TV Tokyo에서 2001~2003년까지 방송했다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한국에서는 "고스트 바둑왕"이란 제목이 붙여져 KBS 2TV를 통해 방영되었다고 하고요. 한국에서 공중파로 방송되었으니 이 애니를 본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 애니는 동명의 만화책을 기본으로 만들었는데 바둑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이 독특해요. 초등 6학년이던 주인공 히카루(進藤 ヒカル, Hikaru Shindo)가 우연히 바둑판을 만지게 되는데 그 바둑판에 기려있던 혼령과 교류하게 됩니다. 제가 혼령과 교류라고 좋게 표현하긴 했지만 흔한 말로 귀신이 씐 거죠. 그것도 바둑귀신.
이 혼령은 후지와라노 사이(藤原佐為, Fujiwara-no-Sai)로 헤이안 시대(794~1185년)에 살았던 뛰어난 바둑 선수였는데 부정행위를 했다고 누명을 쓰고 자살했어요. 하지만 바둑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저승으로 가지는 못하고 이후 이생에서 바둑판에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씩 이렇게 혼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과 교류를 하고 바둑을 함께 즐기는 거죠.
그러고 보면 이 애니에서도 혼령이나 정령의 민간신앙이 강한 일본적 문화를 바둑이란 소재에 잘 혼합시켰습니다. 보통 일본 애니에서 혼령이나 정령이 아주 무섭게도 등장하는데 이 후지와라노 사이는 무시시 하게 묘사되는 귀신이 아니네요. 친절하고 상냥하고 사려 깊어요. 바둑을 사랑하는 혼령이어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달라진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도 즐기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친절하고 사려 깊은 데다가 바둑실력은 신의 경지라서 붙을 거라면 무시시한 귀신보다는 낫긴 해요.
그래도 귀신은 귀신. "난 싫다네~!"
지난 100여 년 전 즈음 에도시대에도 후지와라노 사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바둑천재가 하나 있어서 함께 바둑을 즐겼는데 그 사람이 안타깝게도 30세로 요절했다더군요. 그래서 지금 어리고 잠재능력이 풍부한 히카루가 후지와라노 사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후지와라노 사이는 좋아서 흥분의 바다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바둑의 경기형태도 약간 변해서 신선한 데다가, 요즘은 인터넷 바둑까지 할 수 있으니 1,000년 전 혼령인 후지와라노 사이는 정말 좋아 죽죠. (그런데 이미 혼령이니 또 죽을 수는 없겠네요 ^^) 히카루와 후지와라노 사이의 만남은 후지와라노 사이에게도 즐거움이지만 어린 히카루도 바둑에 대한 열정에 눈을 뜨고 연습과 바둑대결로 계속 성장해 가게 합니다. 그러니까 바둑을 통한 히카루의 성장 만화/애니인 셈입니다.
일본 애니를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의 만화책이나 애니는 그 소재가 정말 다양하고 소재의 전문성도 상당한 수준이에요. 게다가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 있는 소재도 아주 쉽고 재밌게 풀어주고 있고요. 이러니 일본 만화나 애니의 소재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해당 분야에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해서 과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진지함이 일본적 장인정신의 기반인 것 같기는 합니다.
이 애니에서는 한국의 바둑 수준도 높게 평가하고 있더군요. 전반적 바둑 수준이 이 애니를 만든 당시에는 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조치훈 9단, 이세돌 9단 등 유명 바둑인사들이 자주 방송을 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나기도 해요.
그런데 이 애니에서는 한국 사람들을 좀 안 예쁘게 그림 그렸더군요. 일본에서 바둑을 두는 대부분의 한국인 눈은 또 얼마나 작게 그렸는지 그냥 눈이 한 줄여요. 감았는지 떴는지도 모를 수준. 애니메이션 그림 상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상당히 차이 날 정도로 다르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외국인이란 느낌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그린 것 같아요.
게다가 일본의 한국기원에서 바둑을 두면 재일교포일 가능성도 클 테고... 그럼 더더구나 외모상으로 재일교포들은 일본인들과 거의 달라 보이지도 않아요. (이건 많이 봤던 재일교포들을 통해서 경험상 확인함. ^^) 좀 보기 좋게 한국인들 눈도 시원하니 큼직하게 그려주지... 쩝 ㅠㅠ
남편은 이 애니가 바둑이란 소재 때문에도 독특해서 재밌다네요. 그래서 그런지 뭐 하나 흥미 있는 장면이 있으면 제게 쪼르르 달려와 그 내용을 말하는 관계로 저도 함께 이 애니를 조각조각 보고 있어요.
남편님, 지금 도대체 몇 살이세요?
"Hikaru no Go"를 보면서 바둑에 대한 영감도 팍팍 받겠다.... 집에 바둑세트 하나 마련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바둑세트는 처음만 가지고 놀다가 먼지가 쌓일 확률이 크겠지만.
* 이미지 출처: Google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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