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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오늘 하루

마켓에서 만난 온화한 미소의 은퇴 미 해군 대령님

동네 마켓에서 장보며 도넛을 고르고 있는데 아시아계 어르신 한 분을 뵈었어요. 그분께서는 혼자 드실 거라 도넛 하나만 골라 사셨는데 애리놀다와 아이들 네 명이 함께 도넛 더즌 12 + 6 해서 18개 고르니까 아주 귀엽게 보세요. (금요일에 도넛 세일이 있어서 18개를 더즌 가격으로 팔아요) 딸과 손주들을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도넛을 골라 다 박스에 넣은 후 가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도넛을 아주 좋아하죠. 내 친척들도 다 도넛을 좋아해요.

 

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리놀다가 중국계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저는 중국계가 아니에요. 한국계입니다.

 

웃으면서 답해 드렸죠. 온화한 미소의 어르신께서는 한국에 딱 한번 가본 적이 있으시대요. 보통 서울에 많이들 방문하시니까 서울에 가셨었는지 여쭤봤어요. 예상치 않은 도시명을 말씀하십니다.

 

군산에 잠깐 가봤어요. 미 해군이었거든요.

 

하와이에서 태어나 해군에 입대해 장교로 복무하셨는데 군산에 잠시 방문하셨다고 하세요. 잠깐 방문인데도 한국에 대해 기억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셨어요.

 

하와이의 한국계나 한국 음식점 가면 대부분 소고기 불고기를 먹어서 한국에서는 소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보니 돼지고기를 많이 먹더군요.

 

생각해 보니까 예전 한국에서는 돼지고기를 많이 더 즐겨 먹었던 것 같아요. 그분이 한국에 가셨던 때가 아마 70~80년대였을 것 같은데 그때는 가격 면에서 더욱더 그랬을 거예요.

 

어르신께서 애리놀다랑 이야기하고 싶어 하셔서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애리놀다와 함께 있던 아이들 네 명에게도 조부모의 따뜻한 눈빛을 주며 아주 이뻐하시면서요. 성(姓)을 말씀하시던데 울 가족의 성과 같아요. 발음만 중국식과 한국식으로 나뉠 뿐이죠. 성이 같다는 걸 아시니까 반가워하시며 더 좋아하십니다.

 

인사를 드리고 헤어진 후 아이들이랑 도넛 박스를 들고 마켓의 다른 쪽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남편에게 갔습니다. 모두들 함께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어르신께서도 우리 쪽에 오시더군요. 이쪽에 물건을 고르러 오셨나 해서 손을 흔들고 반가워해 드렸더니 애리놀다를 찾아오셨던 것. 명함을 주고 싶으시다며 주고 가세요. 감사히 받았습니다. 어르신이 가신 후 명함을 봤더니 navy captain (해군 대령)이셨어요.

 

지금까지 애리놀다가 이 어르신의 성별을 말을 하지 않아 남성분이라 생각한 분이 많았겠죠? 그런데 이분 여성이세요. 1960년대부터 해군 생활을 하셨으니 여성으로 해군 대령까지 오르셨으면 꽤 높은 계급으로 은퇴하신 거예요. 명함을 보니까 Cold War Monument Foundation (냉전 기념물 재단)라고 적혀 있습니다.

 

물건 다 고르고 캐시어 쪽에 갔더니 대령님께서 바로 앞에 줄 서고 계십니다. 대령님과 동선이 계속 겹치더라고요. 차례가 오길 기다리면서 대령님께 명함에 쓰여 있던 냉전 기념물 재단에 대해서 여쭤 봤어요. (어르신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명함 주고 가셨는데 애리놀다가 읽지도 않고 그냥 집어넣고 그러진 않죠. 주신 거니까 재단명 다 확인했고 성함과 해군 계급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헤헤.)

 

이 재단은 지금 피닉스에 냉전시대 원자력 잠수함이었던 USS Phoenix를 옮겨와 피닉스의 공원에 설치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재단이라고 하세요.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고 민간 기금 모금으로 하는 프로젝트라고 말씀해 주시고요. 사막 피닉스와 잠수함.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피닉스 공원에 뜬금없이 뭔 잠수함 기념비인가 싶은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잠수함이 울 도시 피닉스 이름을 딴 거라 서로 연관이 큽니다.

 

USS Phoenix (SSN-702) (사진출처: 미 해군 사진(U.S. Navy photo))

 

USS Phoenix 잠수함 뱃지는 울 동네 피닉스 이름을 딴 잠수함답게 불사조 피닉스와 도시를 형상화했어요. 바닷속을 가르고 다니는 사막의 잠수함이라... 캬~ 멋있네요.

 

USS Phoenix 뱃지

 

대령님은 USS Phoenix의 함장은 아니셨고요. (미 해군의 잠수함에는 여성 승조원이 탑승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령님은 적군의 잠수함을 사냥하는 걸 가르치는 장교셨어요. 핸드폰을 꺼내 여러 사진을 보여 주십니다. 하얀 해군 장교 군복 입으신 사진도 있었는데 멋있었어요. 칭찬드렸더니 넘 좋아하세요.

 

명함을 이미 읽어 대령님 성함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Capt. Culbertson으로 불러드렸어요. (예의 바른 애리놀다~) 좋아하시면서도 그냥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십니다. 대령님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냉전 기념물 재단 사이트를 쭉 읽어 봤어요. 대령님은 이 프로젝트뿐 아니라 사회 공익사업을 활동적으로 하시는 분이시네요. 홈리스 무료 급식도 하시고요. 또 하나 놀란 건 대령님께서 1943년생이라는 것. 만 75세이셨어요. 한 60대 정도로 젊어 보이셨는데 프로젝트 열심히 하시고 또 사회 봉사 활동을 많이 하셔서 대령님 몸이 세월을 잊으신 것 같아요.

 

냉전 기념물 사업이 지금은 초기 단계인 듯 하던데 이 프로젝트가 빛을 발해 피닉스에서 USS Phoenix 기념물을 곧 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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